이주연 원장

 “저기 간호부장님. 한 10년은 넘은 것 같은데 우리 병원 개원하고 얼마 안되서 매일 진통제 주사 맞으러 오신 분 생각안나요? 나는 그분 아직도 생생한데…”
“아! 알죠. 황 할아버지(73) 매일 진통제 주사 맞으러 허스키한 목소리로 접수에 오셔서 나 황 oo 야. 하셨죠. 그 환자분 때문에 많이 울었어요…”
“아. 부장님. 어떻게 성함까지 기억해요?”
“개원이래 생각나는 환자분이 네 분 계시는데, 그 중 첫 번째 분이예요.”
맞다. 나도 개원이래 생각나는 분이 네 분인데. 우리 간호부장이랑 나랑 생각이 100% 일치한다.

10년도 넘었건만 아직도 생생한 기억과 함께 가슴이 져며온다.
개원하고 2~3달 된 어느 겨울에 그 분이 외래로 찾아오셨다.
가족은 멀리 있고, 본인은 술을 많이 좋아하는데, 어느 때부터 자꾸 목이 아파서 찾아오셨다. 오실 때마다 챙모자를 썼는데, 동네에서 여러 직함을 달고 봉사도 많이 하시고 계시는데, 그 모자는 일할 때 쓰는 모자이지만 자랑스럽게 쓰고 다닌다고 하셨다.

그렇게 외래에 다녀가신 후 한 달 뒤 다시 오셨는데 아직도 목이 아프다고 하신다. 출혈과 함께 어금니 뒷부분에 이상한 것이 보여 조심스럽게 큰 병원 가서 검사해 보라고 말씀 드렸는데 한사코 거절하셨다. 가족도 멀리 있고 그냥 여기서 치료 받겠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조직검사를 통해 결과를 받았는데, 구강암(악성종양)이였다
예상은 했으나 결과를 말씀 드리고 대학병원 소견서를 써 드렸다.

그 뒤로 몇 달을 보이지 않으셔서 잠깐 잊고 있었는데 수개월 뒤 다시 외래에 오셨다. 수술은 받지않고 대학병원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고 지켜 보자고 한단다. 그 뒤로 감기 치료 하러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오셨다.

그 후 몇 달 뒤 다시 오셨는데 예전의 암 부위가 좀 이상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내 나름대로 확인해야겠다며 조직검사를 다시 했다.
일주일 뒤에 결과는 역시 암의 재발이었다.
결과지를 동봉해 드리고 다시 대학병원으로 보내드렸는데 그 뒤 한 달 쯤 뒤에 다시 오셨다.

치료는 포기 했으니 그 저 진통제만 놔 달라고 하신다.
이틀에 한 번씩 진통제와 약을 타가셨다.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보호자도 그 쯤에서 나타났지만 그동안의 경과를 전해 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 뒤 딱 한 달이 지나서 할아버지는 외래로 그 잘 어울리시는 챙모자를 쓰고 오셨다.
안색도 어둡고 몰라보게 마르셔서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원장님 그동안 감사했어요. 나 사실 좀 힘든 게 많았는데, 여기 병원 다니면서 진짜 별로 안아프게 잘 지내고, 마음도 편했어요. 매일 주사 놔 달라고 조르고, 약 타가고 원장도 귀챦았을텐데 미안했어요. 그런데 그래도 마지막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러 왔어요. 나 이제 요양병원 (아마 호스피스 병동인 것 같다) 가는데 꼭 이 병원에 들르고 싶었어요.”
나를 보조 하고 있던, 지금은 간호부장의 새언니가 된 직원이 내 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도 그 감정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솔직히 그 때 나는 그 분의 손을 잡아드리고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 편안히 치료 받으세요.“ 이렇게 말씀 드리면서 통곡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차마 그러질 못했다. 나는 그저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있는 수 밖에 없었다.

그분이 다녀가시고 몇 달 뒤 보호자가 오셔서 우리병원에 다녀가신 2주 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날부터 나는 그분 생각만 하면 몇 분 동안 우는 버릇이 생겼는데, 이게 10년도 훨씬 넘은 지금도 그 감정은 여전하다. 아마 죽을 때 까지 생각날 것 같다.
홀로 많이 외로우셨을텐데 좀 더 도움을 주지 못한 후회와 함께 환자를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드린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이글을 쓰기위해 기억의 한켠을 좀 더 되살려 보겠다고 환자분 챠트를 다시 찾아 보았는데, 기억에 없는 내 글이 챠트에 써 있었다. 그 분이 돌아가신 뒤 5년이 지난 어느 날(보고 싶은 환자분 ㅠ)이라고 쓰여져 있는게 아닌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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