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태 한국폴리텍대학 바이오캠퍼스 교수

내 삶의 무게는 몇 근이나 될까요?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교차로 아름다운 사회 칼럼을 쓰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내가 자의든 타의든 책임져야 할 것들에 대하여 무게를 달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꽤 무게가 나가더군요. 이 세상에 나와 살아가면서 짊어지고 가야 할 짐들이 나를 옥죄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로서의 짐, 남편으로서의 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 혈연과 지연 등에 따른 관계가 짐으로 변해 나의 어깨에 매달려 있음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사는 동안 쉽사리 내려놓을 수도 없는 짐들입니다. 그 짐들은 때론 무겁게 나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네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스케줄이 짜여 있습니다. 나의 업이기도 하겠지만 글 쓰고 말하고 공부하는 일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봉사하는 일도 있고 돈이 생기는 일도 있지만 장사하는 분들만큼 돈을 벌지는 못 하고 있습니다.

교통비 정도지만 감사할 뿐이지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책임이 막중한 일이라 회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처럼 맡은 일들을 성심을 다해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어이 짜증이 나고 말았습니다.

말(馬)은 달려 보아야 힘을 알고, 사람은 같이 일을 해봐야 속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삶의 무게가 가중되다 보면 용량이 초과되고 탈이 나는 법입니다. 내 삶의 무게를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겠습니다. 공부하는 사람도 머리가 꽉 차면 기존의 외운 것을 덜어내고 새로운 지식으로 보충해야 머리를 보존할 수 있다고 하네요.

욕심을 덜어내려고 합니다. 용량초과로 배터리가 방전되기 전에 덜 필요한 것부터 삶의 무게를 덜어내면서 나 자신의 능력을 조절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고교생이 쓴 ‘그래도 계속 걷는다. 라는 책의 내용이 떠오릅니다. 그 학생은 부모가 없이 이모 집에 얹혀살면서 삶이 힘들다고 여겼습니다. 고교 1학년 때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간당 3천 원씩 10시간을 일하고, 욱신욱신 쑤시는 몸을 이끌고 밤늦게 귀가하면서 신세 한탄을 했습니다.

그 학생은 심야에 골목길에서 마주친 늙은 노인이 리어카를 온 몸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학생은 문득 “저 할아버지는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까? 삶을 포기하지 않고 싶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할 정도의 할아버지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온몸으로 버티고 있는데, 젊은 내가 나약해서야 되겠는가라는 오기가 생기자 그 학생은 용기를 내어 계속 길을 걸어 이모 집으로 당당하게 돌아갔다고 합니다.

삶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일제 강점기 시인 김동환의 ‘북청(北靑) 물장수’ 시를 인용해봅니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물을 솨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오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리는 북청 물장수”

사람들은 희로애락을 일상에서 되풀이하며 살고 있습니다. 삶이 기쁠 땐 몸이 날아갈 것 같지만, 삶이 슬플 땐 물먹은 솜방망이처럼 축 늘어지는 게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때로는 삶이 나를 속이고 우울하게 하더라도, 모든 게 나의 탓이고 인연의 소치라고 여기면 한결 삶의 무게가 감소되는 것 같습니다. 사는 동안 이 지구에 소풍 왔다고 생각하고 유쾌, 통쾌, 상쾌하게 살도록 노력하면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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